김구 청문회 1 - 독립운동가 김구의 정직한 이력서

김구 청문회 1 - 독립운동가 김구의 정직한 이력서

  • 자 :김상구
  • 출판사 :매직하우스
  • 출판년 :2014-08-16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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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의 성역 김구에 대한 청문회



『김구 청문회』를 출판하기 위해 우리는 6개월 동안 작업을 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우리는 매우 마음 아팠다. 백범 김구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최고의 독립영웅이자, 정치가이며,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우리는 그 동안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면서 행복한 상상을 수없이 해왔다.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를 읽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누구나 읽었던 <나의 소원>의 감동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김구에 대하여, 김구가 살아 있다면 이 책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워했을 거란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맘이 아프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역사 속에서 수많은 지도자들이 견디어야 하는 고통이면서, 그 혹독한 검증을 거쳐 살아남아야만 비로소 한 시대를 책임지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영웅들 세종대왕, 세조, 광해군, 정조, 영조 등의 왕들과 정몽주, 정도전, 이순신, 송시열, 조광조 등도 사후에 그들이 남긴 저서와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지인들의 기록을 통하여 공과가 재조명 되었다. 그리고 정몽주는 충신 정도전은 역적의 논리에서 접근하던 방식에서 꺼져가는 고려를 끝까지 고집했던 정몽주에 비해 새로운 유교이상국가를 꿈꿨던 혁명가 정도전의 삶을 더욱 높이 평가하게 됐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송시열은 어쩌면 이 책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안중근과 최익현에까지 영향을 줬으리라 생각된다.

김구는 한 때는 우(右)에서는 김일성 등 빨갱이와 내통했다며 좌로 몰리고, 좌(左)에서는 극우로 몰리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김일성 등과 내통했다는 누명은 벗어도 좋을 거 같다. 이 책 어디에서도 김구는 공산주의와 내통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중도파로서 좌와 우의 통합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는 찬사도 걷어 들여야 할 것 같다. 김구 지지자들에게 가장 아픈 부분은 이 점이 될 거 같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 부분이 가장 많이 아팠다. 좌와 우의 통합을 위해 가장 치열하게 애썼다고 믿어왔던 김구를 보내고 나면 우리는 그 대안으로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역사는 그동안 김구를 선택했다. 김구를 선택하는 동안 동시대의 인물 여운형을 버렸다. 어쩌면 여운형은 김구가 받고 있는 찬사를 거의 다 받았어야 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책 제목을 김구 청문회라고 정한 것은 백범 김구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담아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스스로(?) 동학의 접주로 활동했던 구한말과 일본인 스치다를 살해하고 사형집행 직전까지 갖던 시절, 그리고 탈옥을 한 이후 망명생활과 한때 도산 안창호에게 임시정부에 문지기라도 시켜달라고 했던 그 유명한 인사청탁 때와 김구가 주석으로 임시정부를 이끌던 시절, 그리고 해방 이후 이승만과의 갈등과 협력관계, 그리고 안두희에게 저격당하던 순간들과 사후 김구가 민족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 장면들을 다룬다.

나는 개인적으로 왜 김구는 3.1 운동 각종 독립운동 및 독립선언서에 그의 이름이 없었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이 책을 만들면서 그 의문의 상당부분은 풀렸다. 이 책의 신랄하고 가혹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김구의 명성에는 조금의 흠이 가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 할지라도 해방공간 내에서 김구가 걸어온 길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성역화 된 인물은 백범 김구이다. 이승만, 박정희에 대한 신화는 상당부분 깨졌다. 하지만 백범에 대한 신화만큼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신화를 깨는 자체가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이제 김구에 대한 비판을 시작함으로써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그가 선택한 길이 최선의 길이었는지 다시금 묻는 첫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정말 김구의 일생이 우리가 아는 그 어떤 정치인보다 탁월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작가의 말



물론 김구는 친일파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 부일배들로 이루어진 한민당으로부터 수많은 자금을 받았고 그들과 결탁했습니다. 부일협력 재벌 최창학으로 부터 제공받은 김구의 거주지 경교장(죽첨장), 송진우로부터의 900만원, 김연수에게 700만원 그리고 주석김구각하로 극존칭을 써가며 김구와 임시정부 홍보에 앞장섰던 동아일보…등은 극히 일부의 예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백범일지를 윤문, 첨삭한 자가 친일파 이광수였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1962년 김구에게 수여된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대한민국장, 건국훈장 1등급)은 친일전력이 있는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이병도 신석호 등 친일사학자들이 심사하여 결정된 것입니다. 이승만이 숨겨진 친일파라면 백범 김구의 경우 친일파들이 그를 항일독립 통일의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역사가와 그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거가 조작, 왜곡되었다면 이해와 해석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신화화된 김구의 이미지를 넘어 이제 김구의 실체를 보아야할 시점입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구체적 인식은 우리가 가야할 미래의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의 저술 목적입니다. 그리고 김구로 인해 어둠 속에 묻혀버린 독립지사들의 명예가 이 책을 통하여 회복되었으면 합니다. 임시정부정통론이라는 허구의 독립운동사가 걷히고 제대로 된 독립운동사가 정립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전합니다.





<백범일지>는 친일파 문인 춘원 이광수가 윤문 각색한 작품이다



단어로서의 일지(逸志)는 국어사전에 ①훌륭하고 높은 지조. ②세속을 벗어난 뜻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한자사전도 마찬가지다. 즉 《백범일지(白凡逸志)》의 사전적 풀이는 백범자신의 훌륭하고 높은 지조를 쓴 기록물이란 뜻이다. 자신의 얼굴에 스스로 금칠을 한 셈이다. 대부분 무심코 넘어가는 《백범일지(白凡逸志)》의 표현에 몇 몇 학자들은 충격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백범일지》에서 ‘일지’는 숨겨진 기록, 곧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의 일지(逸志)이다. 억지로 끼워 맞추면 일지(逸志)의 의미를 숨겨진 기록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일(逸)은 ‘숨다’라는 뜻이 있고 지(志)의 뜻 역시 기록(記錄)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겨진 기록을 의미하고자 일지란 단어를 선택했다면 志대신 誌를 사용했어야 할 것이다. 즉 白凡逸誌가 되겠다. 그러나 백범은 《백범일지(白凡逸志)》란 용어를 선택했다. 백범이 정말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자 했는지 혹은 단어 사용의 미숙함으로 일지(逸誌)를 사용했는지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아무래도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도산일기》를 비롯하여 앞에서 소개한 독립지사들의 자서전류는 대부분 직해본 백범일지와 마찬가지로 한문식 구식 표현을 사용한 문어체 문장이다. 당연히 독자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백범일지》는 달랐다. 《백범일지》는 처음부터 유려한 문장, 쉽고 간결한 문체로 출발했다. 《백범일지》는 출간되자 말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백범 개인의 일생도 흥미로웠지만,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지사들의 행적을 어느 정도나마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체는 보너스였다. 국사원본은 《백범일지 친필본》이 공개될 때 까지 유일한 원본 구실을 했으며, 이 책을 기본으로 수많은 《김구자서전》과 《김구평전》이 탄생하여 백범일지 집필자의 텍스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국사본백범일지》는 친필본과 차이가 너무 많은 작품이다. 백범의 조상 이야기를 소개한 도입 부분부터 다르다. 친필본은 “조선(祖先)은 안동 김성(金性)이니 김자점(金自點) 씨의 방계(傍系)라…”로 시작되지만 국 사본의 첫 부분은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이다.…”로 출 발한다. 원본에 없는 내용이 추가된 경우다. 더욱이 일부 내용은 아예 빠져 있는 경우도 있다. 사리원에서 경의선 열차를 탔을 때 황해도 봉산의 만세 운동에 관한 이야기 등이 삭제되어 있다. 《국사본백범일지》는 단순 교열이 나 윤문 정도가 아니라 재구성본이라고 해야 맞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백범일지》의 진정한 작가는 누구라고 해야 할까?

백범은 《백범일지》 초간본에서 저자의 말을 남겼다. 이 글에서 백범은 “김지림 군과 삼종질 흥두가 편집과 번역, 철자법 수정 등 궂은일을 했다” 고 서술했다.8) 이 문장으로 인해 오랫동안 김지림이 《국사본백범일지》의 윤문자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광수가 윤문의 주인공임을 알고 있으며 인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김신이 이광수가 윤문자임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김신의 말을 들어 보자.

“춘원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 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 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 의문입니다.”

친일파였던 춘원이 스스로 《백범일지》의 윤문을 자청했는지, 김구가 이 광수의 윤문을 알았는지 등에 관한 사항은 향후 좀 더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분명한 것은 이광수가 《국사본백범일지》의 산파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아무튼 《백범일지》가 전 국민의 교양서로 자리 잡게 된 일등 공신은 아무래도 이광수의 몫으로 돌려야 할 듯싶다.







김구는 과연 동학의 접주였나?



김구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나이 열아홉에 동학의 정식 접주가 되었고, 곧 고향으로 돌아와 팔봉이란 접명(接名)을 지었다고 한다. 여기서 당시 동학의 접주 자격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기술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천도교》편을 보면 동학의 접주 자격은 포교 능력에 따라 점수를 매겨 부여하였는데, 포교 인원 105명 이상인 사람은 접주, 500명 이상은 대접주가 되는 자격을 부여했다고 한다.

이러한 관례에 따르면 김창수는 나이에 상관없이 접주에 임명될 수도 있었다. 백범의 주장에 의하면 그의 연비는 무려 수천에 달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돈화(李敦化, 1884-?)가 편술한 《천도교창건사》 등 동학이나 시천교, 천도교 등의 자료 어디에도 19살 접주, 김창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결정적인 자료가 있다. 백범일지에도 등장하는 최유현(崔琉鉉)이 1918년에 정리하고 1920년에 편찬한 《시천교역사(侍天敎歷史)》를 보면 최유현 등 황해도 대표가 보은을 방문하여 최해월(최시형)로부터 접주 임명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김구에 의하면 계사년(癸巳年, 1893년) 가을에 오응선?최유현 등이 경통 (敬通)을 받고 충청도 보은에 있는 해월 대도주를 방문하는 일행 열다섯 명에 자신도 선발되어 최시형을 만났고 그곳에서 접주 첩지를 받았고 한다. 계사년은 갑오년(甲午年, 1894년)의 착오라 하더라도 김구는 자신의 입으로 분명히 정식 접주가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최유현은 자신 외 6명이 대선사를 방문했고 자신은 해서(海西)수접주로 임명되었다고 기록했다. 김구의 주장과 차이가 너무 많다. 15명과 6명의 차이 그리고 김창수는 아예 언급이 없다.





스치다 사건의 진상





1896년 3월 9일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土田讓亮)를 죽인 사건은 백범 김구의 업적을 꼽을 때 언제나 첫 머리로 등장한다. 소위 국모보수(國母報讐)다. 어린이독서진흥회라는 단체가 엮은 초등학생용 《백범일지》를 읽어보면 이 사건이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어떻게 알려져 있는지 그 연유를 짐

작하게 한다.



시체의 처치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분부하였다. 왜놈은 다만 우리나라와 국민의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물속에 있는 어별에게도 원수인즉 이 왜의 시체를 강에 넣어 고기들로 하여금 나라의 원수의 살을 먹게 하라 하였다.…식후에 토전의 시체와 그의 돈 처치를 다 분별하고 나서 주인 이화보를 불러 지필을 대령하라 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 하는 뜻의 포고문을 한 장 쓰고 그 끝에 ‘해주 백운방 기동 김창수’라고 서명까지 하여 큰길가 벽상에 붙이게 하고 동장인 이화보더러 이 사실을 안악 군수에게 보고 하라고 명한 후에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당시 김구를 심문했던 내용과 언론 등은 스치다의 신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하기와라(萩原, 4월 6일): 나가사키(長崎)현(縣) 평민(平民) 스치다(土田讓亮)

-김효익(4월 19일): 일본인 한 사람(日人一人)

-이완용(5월 1일): 일본사람(日本人)

-하기와라(6월 30일): 행상인(行商人)

-박정양(7월 12일): 일본사람(日人)

-하기와라(7월 18일): 우리나라 사람 스치다(我邦人土田讓亮)

-김창수 초초(8월 31일):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 일본인이므로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라고 생각

-이화보 초초(8월 31일): 일본인 토전양량(土田讓亮)

-김창수 재초(9월 5일): 일본사람, 일본인

-이화보 재초(9월 5일): 일본인

-오기하라(荻原守一, 9월 12일): 우리나라 상인 스치다(我商土田讓亮)

-한규설(10월 22일): 일본상인 스치다(土田讓亮)

-독립신문(9월 22일): 일본장사꾼 토전양량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스치다가 일본군인 혹은 일본 육군 중위라는 말 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일본인으로 기록하다가 어느 정도 신분 이 밝혀진 후에는 일본상인으로 표현했다. 심지어 김창수 본인조차 심문 시에 스치다를 일본인으로 말했다. 《백범일지》에서 스치다의 정체를 일본 육군 중위라고 한 것은 분명히 작의적인 왜곡이었다.





김구에게 종교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보신의 수단이었다



김구가 탈옥을 한 때는 1898년 3월 19일이다. 해주옥과 인천감옥에 구 금된 지 2년만이었다. 이제 22세가 되었다. 탈옥 후의 행적은 《백범일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김구가 공식문서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10여 년이 지난 이후부터다. 이 기간 그에겐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결혼을 하였고 위정척사계열이었던 스승과 결별하였으며 이름도 여러 번 바꾸었다. 가장 중요한 변신은 기독교로의 개종이다.

백범의 종교편력은 유명한 이야기다. 무속?유교?풍수?관상학?동학 불 교?기독교… 사후에는 가톨릭의 성세를 받아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얻었 다. 김구는 조선 민중이 선택할 수 있던 대부분의 종교와 접촉한 셈이다. 그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유교를 입신의 수단으로 삼았으나 과거 낙방 으로 좌절했다. 그 후 풍수?관상 등 무속과 관련된 학문에도 잠깐 흥미를 보이기도 했으나 곧 동학에 입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동학도가 된 것도 기인이사, 이적 등 미신적인 요소에 대한 호기심이 큰 동기였다. 그가 불교 에 입적하여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얻은 것은 탈옥 후 신분세탁의 의미가 큰 개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너무 쉽게 믿고 너무 쉽게 그 종교를 버렸다. 백범에게 종교는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었다.

백범의 종교편력은 묘하게도 그의 이름과도 연관이 깊다. 그가 동학에 입도했을 때 창수로 개명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백범일지》에 김창수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그가 동학에 입도하여 연비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주장할 무렵이다



♧ 이봉창 의거에서의 김구의 역할

이봉창이 상해에 도착한 것은 1930년 12월이다. 그리고 이듬해 1월 경 민단사무소를 방문했다. 상해를 떠나 고베(神戶)로 출발한 것은 1931년 12 월 17일이다. 그러므로 약 1년 동안 민단사무소를 거점으로 백정선, 김동호 등을 만난 셈이다. 이 기간 동안 백정선과 김동호는 본명은 물론 임시정부내의 위치, 그 동안의 이력 등 자신들의 정체는 철저히 숨겼다. 이봉창은 1932년 10월 11일 사형이 집행될 때 까지 김구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재판 심리 중 백정선에 대해서 이봉창이 어떻게 발언 했는지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 나는 전에도 말씀드린 대로 조선 민족을 위해 희생할 각오를 가지고 그러한 행동으로 나갔던 것이므로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또 한 일본 천황을 폭격할 생각으로 폭탄을 던졌던 것이지만 백정선이 나에게 이야기한 것과 같은 폭탄의 위력이 없었기 때문에, 나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932.01.10. 청취서》



■ 내가 여러 번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죽을 각오로 천황 폐하의 생명을 빼 앗으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폭탄의 위력이 작아 실패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상해에서 시험해 보자고 했습니다만 백정선이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대단한 위력이 있는 폭탄이라고 말하면서 시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기에 이를 믿었던 것이 실패의 원인이며 이것에 대해서는 백정선을 원망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1932.01.12. 제3회 신문조서》



■ 나는 백정선을 그렇게 학문이 있는 사람이거나 또 인격자라고도 생각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민단의 단장이며 다른 조선인들이 백정선을 보면 인사한다는 점 등에서 나는 백정선을 상해에 있는 조선인의 총 대표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32.02.13. 제7회 신문조서》



■ 나도 백정선의 배후에 상당히 훌륭한 사람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상상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누구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민단 사무소에서 나는 ‘이 사람이다’라고 할 만한 훌륭한 사람이나 인격자 같은 사람과 만난 적이 없습니다.

《1932.02.13. 제7회 신문조서》



이봉창은 재판과정을 통하여 백정선이 김구(金龜)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무렵의 김구는 金龜 대신 金九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 했다는 것은 몰랐고 더욱이 김창암, 김창수 등의 이름을 예전에 사용했다 는 것은 전혀 몰랐다. 청취서와 신문조서, 공판조서 등 제판 기록을 보면 유난히 눈에 띄는 내용이 있다. 자신의 의거가 실패한 것에 대하여 “대단한 위력이 있는 폭탄이다. 시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 백정선의 호언장담을 믿었음에 아쉬움과 함께 분노를 표명하는 장면이다. 충분히 납득이 간다. 치밀한 계획 없이 의욕만 앞섰던 백정선에게 유감을 표시함과 동시에 그의 학문이나 인격을 거론한 점도 흥미롭다.





송진우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거론되는 김구



장덕수의 정치노선은 송진우와 거의 유사했다. 소위 훈정론의 재등장이 었다. 임정법통론과 훈정론의 간격은 결국 두 사람의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서중석의 표현대로 “장덕수는 중경임시정부측의 우익 헤게모니 장악에 장애적 역할”을 한 것이 그가 암살당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다시 재판정으로 돌아가자. 1948년 3월 12일 오전 9시경, 김구는 제8회 군률재판 공판정에 증인으로 출두했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1910년 안명근 사건 관련자로 체포된 후 38년 만에 서게 된 법정이었다.

김구는 증인 신문 내내 살해교사를 부인했다. 간접적으로 지시한 사실도 없다고 했다. 왜 김석황 등의 진술과 틀리냐는 검사의 질문엔 고문에 의한 강요된 답변이라고 대응했다. 1차 신문은 4시간 반이나 걸릴 정도로 장시간 소요되었는데, 정작 해프닝은 제2차 신문 때 일어났다. 김구는 이날 김 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총선불참을 공식 선언했다.71) 오랫동안 이어져왔던 이승만과의 밀월이 완전히 깨어지는 순 간이었다.

그리고 3월 15일 오전 9시, 김구는 두 번째 진술을 위하여 법정에 섰다. 비교적 평온했던 첫날에 비해 이 날은 김구의 진술거부, 퇴청소동, 박광옥 의 난동 등으로 인해 재판자체의 정상적인 진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하기 전에 안두희는 김구와 독대를 한다. 그 독대의 과정에서 안두희는 김구에게 다음과 같이 추궁을 한다.



「그리고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는 무엇 하는 기관이며 혁신탐정사(革新探偵社)는 누구의 것이며 또 한독당(韓獨黨)의 소위 비밀당원 조직망이란 무슨 사명을 부여한 결사입니까. 한국군대는 김구 씨의 군대라는 외인(外人)의 평론에 대하여 선생님은 무슨 말로써 반박하시렵니까. 선생님! 제게 8?15기념일을 전후하여 중대한 지령이 있을지 모른다던 예비명령은 무엇에 대한 준비입니까.」

나의 음성은 높을 대로 높았다. 선생님도 노기등등한 안색으로 안절부절 못하시면서,

「무어야? 이놈 죽일 놈! 입이 달렸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고함을 지르신다. 이제는 피차가 사리를 가릴 이지(理智)의 여유를 잃었다.

「여순 반란은 누가 교사한 것입니까?」

「뭐야 이놈.」

주먹으로 서안을 치신다.

「표(表)소령, 강(姜)소령과 기거를 같이하던 놈은 어떤 놈입니까?」

「저런!」

책 뭉치가 날아온다. 얼굴에 맞았다.

나도 주먹을 부르쥐고 고함을 질렀다.

「송진우 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벼루가 날아와서 머리를 스치고 뒷벽에 부딪힌다.

「장덕수(張德秀) 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이 놈! 너 이놈!」

붓이 날아오고 또 책이 날아오고 종이 뭉치가 날아오고….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잠깐 생각의 여유를 포착하려했다. 무슨 말씀인지 기억은 없으나 선생님께서는 노후(怒吼)를 계속하시는 것이다.





해방공간에서의 김구의 노선



반소?반공?임정봉대를 추진했던 김구의 노선보다 반소?반공?남한단정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노선이 보다 현실성 있는 대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한민당 선전부장 함상훈은 미국무장관보 힐드링의 연설을 부연하는 담화에서 “남조선에 조선인에 의한 자치정부가 수립되고 UN의 일원이 되어 그 정부가 조선 문제를 UN에 호소하여 남북통일의 주동체가 될 것을 고대 한다”며 아예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의 희망을 표시하기도 했다. 힘의 추는 급격히 이승만에게로 기울고 있는 중이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느슨한 형태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이승만의 도미로 그의 부재시 임정봉대를 위한 쿠데타 시도로 잠시 불편한 관계였던 두 사람이 미소공위 타도를 위해 다시 힘을 합쳤던 것이다. 그들은 ‘6?23’봉기를 계획하여 다시금 반탁의 물결이 일어나길 기도했다. 하지만 미군정과 경찰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는 반탁시위는 애초부터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미소공위 무력화를 위한 김구의 마지막 선택은 역시 암살과 테러로 귀결 되었다. 제2차 미소공위가 개최되면서 가장 주목을 받은 인물은 중도파인 여운형과 김규식이었고, 실제 이들이 가장 중요한 테러?암살 대상자였다





단정찬성에서 좌우합작, 김구는 왜 노선을 변경했나?



이승만에 비해 김구의 노선은 갈짓자 행보였다. 그의 노선은 반소?반공 ?반탁?임정봉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 은 임정정통론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정적 제거 작업을 망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정적과의 제휴 역시 기피하지 않았다. 김구의 노선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단정에 대한 그의 처신이다. 이승만이 단정론자라면 김구는 통일론자라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단정노선에 김구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는가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많다.

1947년 11월 말부터 12월 초, 짧은 기간이지만 그 무렵 김구의 노선은 분명히 남한단정론의 인정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이승만의 주장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남조선총선거로서 정부를 세워야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김구가 일종의 항복 선언을 했다는 점이다.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할 것이다.”라고 발표한 그 다음 날인 12월 23일부터 김구는 수차례에 걸쳐 이승만을 방문했다. 묘한 것은 김구의 폭탄선언에 대한 언급은 일체 없었고 회담 주제는 오로지 국의와 민대의 통합문제뿐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통합단체의 간부 진영과 선거법 문제 등에 관해 12월 말 내내 협의했다.

결국 이승만은 김구와 결별하고 만다. 한민당과 한독당이 결합되지 못할 경우, 수족이 다 잘린 김구보단 돈과 조직이 건재한 한민당이 보다 필요했을 터이다. 정치가 이승만의 당연한 선택이었다.

단정?단선을 반대한 대부분의 정당?단체가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통일을 열망한 조선민족의 각 정당?단체들을 죄다 좌익으로 몰아 불온시 했으며, 오직 김구와 김규식에게만 면죄부를 주었다. 미국이 김구와 김규식을 회유?설득하고자 한 것은 양김 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보여주는 다음의 문서가 참고 된다.

양김 씨는 표면적으로는 ‘통일한국’을 부르짖지만, 남북연석회의를 제안 하고 평양회담을 받아들인 실질적인 이유는 그들의 지지가 보잘 것 없으며 선거에 당선되는 것조차 불투명하자, 경기가 시작되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관점은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남북연석회의 이후 김구와 김규식이 미군정과 어느 정도, 어떤 선까지 접촉하였는가는 확실한 정보가 없다. 그러나 서로 간의 공감대 속에서 공동성명서에 서명을 함께 했던 이들과 연대하지 않고 오히려 단정세력 쪽으로 조금씩 다가선 것은 분명하다.





안두희는 왜 김구를 암살했는가?



김구의 암살을 이해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그 당시 김구의 노선을 파악해야만 할 것이다. 남북연석회의 이전 그의 노선은 반탁?반소?반공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임시정부 정통론이 무엇보다 우선 적인 대원칙이었다. 그 후 남한의 단정실시가 확실시되자 이승만과의 연대에 의한 단정노선으로 변한다. 그리고 남북연석회의를 전후하여 노선이 또 변하게 된다. 이제는 미소양군 철수 후 남북한총선거 실시였다. 하지만 평양을 갖다오고 난 뒤 남북정권이 들어서자 그의 노선은 다시 요동치게 된 다. 마지막 시기 김구의 노선은 북조선과의 협상을 포기하고 그 대신 남한 정계복귀에 중심을 두었다. 그의 마지막 변신은 조용히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이승만 암살, 군부를 동원한 쿠데타 그리고 제2회 총선거 참가에 의한 정권교체… 등이 김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김구의 움직임은 이승만과 미국CIC에 의해 세밀히 관찰되고 있었다. 미국은 좌익과의 연대에 의한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지만, 이승만은 김구의 현실참여에 두려움을 느꼈다. 결국 미국의 묵인과 방조 하에 이승만 권력의 핵심세력에 의해 김구의 죽음이 있게 되었다. 물 론 아직까지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우리가 풀어야할 숙제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안두희의 경우 어쩌면 확신범일 수도 있다. 이승만 진영이 의도하고 조작한 김구에 대한 이미지 즉 원래는 공산당을 때려잡던 김구가 변절하여 공산당과 연대하고 있다는 마타도어를 그대로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 좀 가혹하게 말하자면 안두희는 연극무대의 피에로였으며 이승만 등 최고 권력자들에게 이용을 당했다는 뜻이다.





김구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한 박정희와 친일사학자들



건국공로훈장 제도는 1949년 4월 27일 대통령령 〈건국공로훈장령〉이 공포되면서 제정되고 시행되었다. 최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은 1949년 8월 15일에 중앙청에서 거행된 건국공로자 표창식에서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에게 수여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 제도의 문제점 몇 가지만 지적한다.

첫째,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의 서훈 자격을 심사했다는 점이다.

1962년 문교부 독립운동유공자 공적조사위원회 명단 7명 속에는 이병도와 신석호가 들어가 있다. 이 두 사람은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등의 전력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제된 이들이다. 친일이력이 있는 박정희 와이병도, 신석호 등이 김구를 최고 항일 투사로 만든 셈이다.

둘째, 공적내용이 사실과 다른 경우가 너무 많다.

김구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보훈처의 작성한 김구의 공적조서를 보면, 김구의 독립운동 기간을 50여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1894년 동학혁명 시기부터 김구가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보고 있는 모양이나 이것은 분명히 오류이다. 또 인천감리영(仁川監理塋)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집행일인 8월 26일 특명으로 사형집행이 중지되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며, 김구가 살해한 매약상 스치다(土田讓亮)를 일본 육군중위(倭陸軍中尉)라고 표현한 것도 백범일지를 일방적으로 신뢰한 결과이다.

셋째, 서훈기준이 모호하다. 건국훈장이냐 독립훈장이냐?

유공자들이 수여받은 훈장의 정식명칭은 건국훈장(建國勳章,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이다. 13년 전 이승만이 받은 훈장을 같은 법률의 적용 하에 김구가 받은 것이다.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은 건국훈장이라는 용어다. 여기서 말한 건국은 1948년 성립된 이승만 정부의 출범일 것이다. 남한 단독 정부의 정통성 여부와 무관하게 아무튼 이 정부가 표방한 정치체제는 공화정이다.





516쿠데타와 김구의 아들 김신



박정희와 김구의 관계는 김구의 아들 김신과의 인연을 생각해 보면 보다 뚜렷해진다. 쿠데타 발생 사흘 후인 1961년 5월 19일에 발표된 32명의 군사혁명위원 명단에는 육군소장 박정희와 함께 공군중장 김신의 이름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5월 23일에는 육군참총장 장도영 등과 “전력을 다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김신은 박정희 정권과 내내 함께했다. 1962년 공군참모총장직을 예편한 김신은 타이완 주재 대사로 부임해 8년간 일했다. 1971년 귀국한 김신은 대통령의 권유로 공화당 후보로서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그 후 교통부 장관을 거쳐 유신시대에는 대통령 추천으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을 거쳐 백범김구기념관 관장 및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이 그의 이력이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정권을 거쳐 현 박근혜 정권까지 양지만을 선택한 것이 그의 생애였다.

김구의 아들 김신이 박정희의 쿠데타에 일조함으로서 얻게 된 과실은 엄청났다. 김신 개인의 일신영달과 가족들의 기득권 진입은 차치하고라도 아버지 김구는 진보?보수?여?야의 경계와 상관없이 대다수 국민이 숭배하는 민족의 영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의 배경에는 민족의 영웅으로 김구를 선택한 박정희의 공로가 크다.

한편, 독재자 이승만의 대체자로 김구를 선택한 결과는 이승만의 문제점 을 덮는 효과도 있었다. 이 책을 통하여 줄곧 거론하였지만 김구와 이승만은 너무나 오랫동안 동지이자 동반자 관계였다. 그러므로 김구의 일생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이승만의 반민족적, 반민중적 행위에 대한 저항을 제 대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과오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시기의 박용만, 태평양 전쟁 때의 한길수, 해방공간에서의 여운형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역사는 박용만?한길수?여운형을 외면하고 김구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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